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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비소리에 잠못이루고(안광성) &Blue eyes crying in the rain(섹소폰)

2004-07-25 16: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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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비 소리에 잠 못 이루고

나는 비를 좋아합니다.
그것이 소낙비이든 보슬비이든 폭풍우이든 장마비이든 간에 비는 다 좋습니다.
이른봄에 내리는 비는 회색의 겨울 도시를 말끔히 씻어줍니다.
빌딩에 내리는 비, 나목의 가로수에 내리는 비, 외로운 가로등에 내리는 비,
전선주에 내리는 비, 페이브먼트에 내리는 비는 뽀얀 도시의 먼지를 말갛게
씻어줍니다.나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습니다만 봄비 내리는 먼산이나
들을 바라보노라면 바야흐로 봄이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장독대 위에 장마비가 굵은 소리를 내면서 떨어질 때면 나는 으레 어머니에게
졸라서 감자를 쪄먹든지 부침개를 해먹습니다.굵은 빗방울이 처마끝으로 해서
마당에 떨어지면 이내 마당은 황토흙물이 되고 거기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비눗방울처럼 떠서 흘러갑니다..그런 빗방울이 우물가 울타리 위에 오른
호박잎이나 빨가장이 피어 있는 석류꽃에 내릴라치면 왠지 모르게 군침이 돌기 시작합니다.
소를 먹이는 일이나 김을 매는 일도 걱정은 되지만 마음도 느긋이 대청마루에서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갓 볶아낸 콩이나 밀, 갓 삶아낸 감자, 갓 지져낸 부침개를
먹는 것이 일품이었습니다. 낮에 내리는 비도 좋지만 역시 비는 밤에 내려야 합니다.
일찍이 중국 당나라 때의 궁정시인이요 화가였던 왕유는 "빗속에 산과실이 떨어지는데
등잔 아래서는 풀벌레가 운다" 고 노래했습니다만 내 일찍이 고향을 떠나 멀리
객창에서 밤을 보낼 때, 때로는 봄비 내리는 밤이나 가을비 내리는 밤에
얼마나 외로운 청춘의 뒤안길에서 말못할 안타까움과 서러움과 기쁨과 희망에
몸살을 앓으며 울었던가요. 그런 밤에 내리던 빗소리를 들으며 읽었던

주요한씨의 <빗소리>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우에 속색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김동명씨의 <파초>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박목월씨의 <봄비>

조용히 젖어드는 초(草)지붕 아래서
왼종일 생각나는 사람 있었다

이병기씨의 <내리는 비>

짐을 매어놓고 떠나려 하시는 이날
어둔 새벽부터 시름없이 내리는 비
내일도 내리소서 연일두고 오소서

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불빛은 하염없이 졸고 있는데
자리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숙제를 풀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내일 일이 걱정이 돼서도 아닙니다. 그냥 그저 잠이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냥 마음이 외롭고 괴로우면서도 기쁘고 행복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세속에 물들지 않는 인간 본연의 순수 그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비는 내 어린 심성을 말갛게 씻어주었던 것입니다.
비가 오고 있습니다. 비에 젖은 도시를 바라보십시오. 그 옛날 시골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전원을 그려보십시오. 밤비 소리에 잠 못 이루었던 지난날들을
회상해보십시오. 거기에 진실된 당신의 모습이, 본래의 당신 자신이 있을 겝니다.
주루룩 주루룩 소리를 내며 투드럭 투드럭 산과실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바로 당신이 잠든 이 깊은 밤에 비는 내리고 있습니다.

안광성수필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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