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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하종오) & Alain Barriere 의 Un Poete 2003-06-13 00: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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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비 오는 날 처마 아래 앉아 바라보네
금낭화 잎에 떨어진 빗방울은 구르다 떨어지고
두충나무에 떨어진 빗방울은 곧장 흘러내리네
연주자를 꿈꾸는 아들이 치는 재즈 드럼소리 새어나오고
중학생 딸은 침대에 누워 이불 뒤집어쓰고 잠들었을까
부엌에서 철판에 옥수수기름 번지는 냄새가 흘러나오네
저 빗줄기 사이로 내가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
아들 방에 방음 공사를 해준 게 작년 이 맘때였던가
재작년 이맘땐 딸에게 커서 무엇이 될 거냐고 물었던가
재재작년 이 맘땐 아내더러 나 죽으면 혼자 적막해서
어째 살 거냐고 물었다가 어떤 핀잔 듣고 맘 상했던가
앵두나무 적시며 빗방울은 잎사귀 사이를 건너고
전나무 적시며 빗방울은 윗가지에서 아랫가지로 내려앉네
그 옆에 십 년도 더 묵은 개나리가 벌레에게 갉아먹혔는지
줄기만 남아서 빗방울도 받지 못하는 걸 이제 발견하네
저기에 와서 가지를 뻗어내기 전에는 어디서 무얼 했을까
그 적에 이미 날 알아봤다가 훗날 찾아와 머물게 되었을까
금낭화도 두충나무도 앵두나무도 전나무도 만난 기억이 없네
그보다 더 수십 년 전 미리 날 알지 못했을 아내와 아들딸은
어디서 무얼 하다가 내게 와서 오늘은 저렇게 요요한가
이제 빗방울은 나무들 속으로 스며들어 녹음을 만들고
아내는 파지짐 구워 쟁반에 담아 아들딸 부를 텐데
저 빗줄기 사이로 내가 왔는지도 모르니
저 빗줄기 사이로 나는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

하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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